Title아프리카 경제의 실상에 비추어 본 서구식 경제발전론의 한계 (월드뷰 2월호)2025-02-03 09: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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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리카 경제의 실상에 비추어 본 서구식 경제발전론의 한계 

출처: 월드뷰 2월호

저자: 박종대 (前 주 남아프리카공화국 대사/現 연세대학교 국제대학원 객원교수)


1. 2024년 노벨경제학상 수상자들의 견해에 대한 평가

2024년 노벨경제학상은 다론 아체모글루(Daron Acemoglu), 제임스 로빈슨(James A. Robinson), 시몬 존슨(Simon Johnson)에게 수여되었다. 이들은 저서 “국가는 왜 실패하는가”(Why Nations Fail)에서 개인의 권리가 보장되고 법치주의가 잘 지켜지는 민주주의 체제하에서 경제적 발전과 번영이 이루어질 수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 즉, 국가의 정치적, 경제적 제도가 국가의 번영 여부를 좌우하는 가장 중요한 요인이라는 것이다. 이를 ‘포용적 제도(inclusive institutions)’와 ‘착취적 제도(extractive institutions)’라는 두 가지 개념으로 설명하고 있는데 전자는 자유를 존중하며 다수에게 경제적 기회를 제공해 장기적인 경제 성장을 이끄는 반면, 후자는 소수가 권력과 부를 독점하고 다수의 기회를 억압해 경제 발전이 저해되고 궁극적으로 국가적 실패로 귀결될 수 있다는 지적이다.

로빈슨 교수는 국내 언론과의 인터뷰(조선일보, 2024.10.15.)에서 북한은 매우 착취적인 제도에 기반한 사회인 것과는 대조적으로 한국은 1960년대와 1970년대에 교육에 대한 막대한 투자로 아주 포용적인 사회를 만들고, 수출진흥정책을 아주 성공적으로 추진하였으며, 재능과 창의성이 번성할 수 있는 제도들을 만든 것이 한국의 놀라운 발전의 원동력이 되었다고 보았다. 아체모글루와 존슨도 다른 언론 인터뷰에서도 유사한 견해를 피력했다. 이번 노벨경제학상 수상자들이 국가경제 발전의 성패 여부를 제도적 관점에서 논하고, 국가 번영을 위한 정치, 경제적 제도의 중요성을 부각시킨 것은 분명 의미가 있고 평가할 만하다고 본다.

그러나 수상자들의 인터뷰 내용을 자세히 읽어 보니 아쉬운 점도 많았다. 이념, 가치, 제도를 중시하는 서구 중심적인 시각이 특히 개도국 경제 발전의 요건 또는 원리를 이해하는데 있어서 여전히 근본적인 한계를 보인다는 점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저자들의 논리도 기본적인 맹점이 분명히 있다. 우선 ‘제도’라는 개념이 모호할 뿐만 아니라, ‘포용적’, '착취적’이라는 용어는 각각 ‘ 좋은 것’, ‘나쁜 것’이라는 평가적 의미가 내포되어 있어 결국 ‘좋은 것은 좋고, 나쁜 것은 나쁘다’라는 식의 동의어 반복으로 들릴 수 있다. 더 중요한 것은 애초 포용적 제도와 착취적 제도가 어떻게 해서 발생하는지에 대한 아무런 설명이 없다.

그리고 사실관계에서도 정확하지 못한 점들이 많이 드러난다. 가령, 한국이 민주주의를 달성한 이후에 경제 성장이 가속화되었다는 둥 한국의 경제 발전 과정을 잘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나아가, 개도국에 적용할 때 더 많은 한계점이 드러난다. 결국 이들의 주장은 희망 사항(aspiration)과 실제를 혼동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든다. 엄밀히 말해, 제도란 어떤 불변의 고정적인 것, 기계 장치처럼 자동으로 그 기능을 발휘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행동이 뒷받침되어야 하는 것이다. 아무리 좋은 법과 제도가 있다 하더라도 그것을 지키고 실행으로 옮기는 것은 사람들의 인지력, 주관, 가치관, 판단력, 행동력, 의지, 태도 등에 좌우된다. 그리고 사람들은 합리적으로만 행동하지 않는다. 국민성 등 정신적, 문화적 요소 외에 지도자의 리더십도 매우 중요하다.

 

2. 인류 보편 가치와 아프리카 독립 국가들의 등장 배경

오늘날 비서방 국가 대부분은 20세기에 독립을 쟁취한, 근대적 형태의 국민국가(nation state) 경험이 일천하고, 아직도 ‘국민 건설’ (nation-building) 과정에 있는 경우가 많다. 아프리카 국가 들이 특히나 그러하다. 아프리카는 54개국 중 식민지 지배를 경험하지 않은 나라는 라이베리아, 에티오피아 등 오직 2개뿐이다. 서방 국가들은 20세기에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겪으면서 이에 대 한 반성으로 인류 보편주의적 가치에 기반한 평화와 번영의 국제질서 구축에 나선다. 그 가시적인 결과물이 1948년 UN 세계인권선언을 비롯한 무수히 많은 국제적 선언문, 규약 등이다.

우리가 오늘날 당연시하는 보편적 가치인 인간의 존엄성과 평등, 자유민주주의, 법치주의 등은 20세기 후반에 공식화되고 확립된 것이다. 주요 서방 국가들은 대략 4백 년이라는 아주 긴 여정 동안 민족국가 수립 및 정치, 사회, 경제적 발전을 이룩하였다. 오늘날 서방 국가들이 표방하고 도모하는 주요 제도들, 민주주의 방식은 20세기에 이르러서야 달성된 것이고, 국가적 발전이 한창 진행 중이던 당시는 권위주의, 비민주적인 요소들이 팽배해 있었다. 다시 말해 저자들이 포용적 제도라고 말하는 것들은 개발의 결과물이지 개발을 위한 요건이 아니었다.

아프리카 대륙은 독일의 비스마르크 재상이 주도한 1884년 베를린 회의에서 영국, 프랑스, 벨 지움, 포르투갈, 독일, 이탈리아, 스페인, 네덜란드에 의해 공식적으로 식민지 분할되었다. 다수의 아프리카 국가들이 세계대전 이후 독립을 맞이하게 되었으나 특히 사하라 이남 국가들의 경우, 탈 식민지화, 독립 달성 과정에서 국가 건설 (state-building), 국민 건설(nation-building)을 위한 자신 의 진지한 고민과 노력이 없이 사실상 서방의 제도를 그대로 이식받아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3. 아프리카 경제의 실상과 서구식 개발 접근 (제도적 접근 및 소득주도성장론)의 한계

아프리카 국가들은 독립 초기인 1960, 1970년대에 경제발전 전략으로 수입대체산업화 (import-substitution industrialization) 전략을 추진했으나 소기의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세계은행 등을 비롯한 국제기구, 원조공여국들 등 국제사회의 지속적인 대규모 지원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저발전 상태가 지속되고 있다. 무엇보다, 많은 아프리카의 국가들은 끊임없는 서방세계의 권고, 주문, 압력에 따라 서방식 제도와 정책들을 받아들여 왔고, 선거민주주의(electoral democracy)에 서도 상당한 진전을 보였으나 여타 세계와의 경제적 격차가 줄기는커녕, 계속 벌어지고 있는 실정이다. 그런데 경제정책의 목표나 의미가 선진국과 개도국 간에 상이할 수밖에 없음은 아프리카의 현실을 직시하면 분명해진다. 선진국의 경우는 경제적 안정, 분배, 복지가 높은 정책적 우선순위를 차지한다. 하지만 아프리카의 경우 빈곤퇴치, 경제적 성장, 산업화, 경제적 구조 전환, 인프라 건설, 농촌개발, 공공 및 민간 부분의 역량 강화, 인적자본 형성, 공직자 기강 확립 등 시급한 과제가 너무나 많다. 분배와 복지를 제대로 할 재원도, 국가적 역량도 부족한 실정이다.

아프리카의 경우 이처럼 기초적 조건들(initial conditions)이 미비할 뿐아니라, 시장이 발달하지 못하고, 국민 건설(nation-building) 과제가 미완인 상태임을 간과한 채 서방국가, 국제기구 등 주류 국제 개발커뮤니티가 아프리카에 대해 이념 및 제도적 중요성만 강조하는 것은 오히려 아프리카의 저개발을 고착화하는 결과만 초래한다고 본다. 그래서 제도의 도입, 구축만으로 국가발전이 저절로 달성된다는 것은 잘못된 인식이다. 아프리카 국가 중에는 아시아 국가들보다 법치와 민주주의 등 선진적 제도를 잘 받아들인 나라도 많지만 동 국가들은 경제적 저발전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제도는 그것이 규범적 관점에서나 기능적 측면에서 아무리 좋은 것이라도 그 존재 여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것을 어떻게 효과적으로 실행할 수 있을 것인가가 관건인데 이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는 제도 외적 변수들이 수없이 많다. 따라서, 제도들은 물론 중요하고 좋은 제도들을 갖추기 위한 노력을 개도국들은 부단히 경주해야겠지만 인적자본 형성을 통한 민간, 공공주체들의 역량 강화, 산업화, 인프라 시설 확충, 그리고 이런 것들을 토대로 한 지속적인 경제 성장 및 사회 구조적 변환, 정치적 발달 등이 이루어져야 실질적인 제도적 발전과 제도의 기능 발휘가 가능해지 는 것이다. 이 모든 복잡한 현실을 간과한 채 ‘포용적 제도’ 대 ‘착취적 제도’라는 너무 단순 하고 추상적인 이분법적인 접근만으로는 어려운 경제적 발전과 번영 문제를 풀어나갈 수 없음은 자명하다.

이와 관련, 유사한 한계점을 보이는 서구식 소득주도성장론의 문제점에 대해서도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고 본다. 소득주도성장론은 소득 분배의 개선과 사회적 안전망을 통해 소비를 촉진하고 경제 성장을 이루자는 것인데 특히, 복지 정책을 강조하며, 소비자 중심의 경제 성장을 추구한다. 그런데 아프리카 경제의 경우, 소득주도성장론은 적용하기 어려운 측면이 많다. 아프리카 대부 분의 국가는 농업 중심의 경제 구조를 갖고 있고, 고용의 측면에서 비공식 경제 부문이 공식 경제 부문보다 훨씬 크다. 이런 상황에서 생산성 증대, 경제의 전반적 역량, 효율성 제고가 최대 관건이 지 소득 및 소비 증대가 우선순위가 될 수 없다. 아프리카에서는 산업화와 기초적인 인프라 확장이 먼저 이루어져야 하므로 더더욱이 소득주도성장론은 아프리카에 만연한 저성장의 문제를 오히 려 가중시킬 위험성이 있다고 판단된다.


4. 아프리카가 채택해야 할 바람직한 경제 발전 접근에 대한 소견

서방세계와 국내의 학자들이 즐겨 사용하는“독재자(dictator)”라는 용어의 남발도 문제가 많다고 본다. 개도국 지도자들이 오랫동안 집권했다고 하여 모두 같은 잣대로 “독재자”로 지칭하는 것은 옳지 않다. 가령, 김정은과 박정희, 전 우간다 대통령 이디 아민, 전 자이레 대통령 모부투 세세 세코와 현 르완다 대통령 폴 카가메를 같은 “독재자”로 규정하는 것이 합당한가는 생각해 볼 문제이다. 싱가포르의 전 수상 이광요를 포함, 전자는 “권위주의적 통치자”로 부르는 것이 더 적절 하지 않나 생각된다. 권위주의적 통치자 및 통치 방식은 과거에는 물론이고 지금도 서방세계를 포함한 전 세계적으로 흔한 현상이다. 지금 서방권에서도 ‘비자유민주주의’(illiberal democracy)라는 현상이 21세기에 들어 등장했는데 이는 외형은 민주주의 절차를 따르는 것으로 보이지만 의회 다 수당에 의한 입법 독주 등으로 사실상 민주주의적 가치와 질서가 크게 훼손된 것을 말한다.

아무튼 아프리카 국가들로서는 보편주의적 기준을 추구하는 것이 옳고 그렇게 해야 하겠지만 진정한 경제 발전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이와 함께 한국식 ‘신산업 개발국가’(New Industrial Developmental State) 접근방식을 참조하고 이로부터 교훈을 얻어야 할 것으로 판단된다. 서구의 학자들은 1980년대 후반-1990년대 초반 한국을 포함한 동아시아의 네 마리 용의 경제 발전의 특징을 ‘개발국가’(Developmental State)라는 개념을 사용하여 설명한 바 있다. 필자는 한국의 경제 발전 모델이 오늘날에도 개도국들에 적용 타당하다는 것을 시사하기 위해 ‘신산업 개발국가’라는 용어를 사용코자 한다. 한국의 경제 발전 방식은 추상적인 이념과 이론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철저히 실용적 관점에서 보편성을 갖는 경제 발전의 근본원리와 인적자본의 축적 및 활용의 중요성을 잘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